겸암 류운룡(謙菴 柳雲龍)선생의 증손인 회당 류세철(悔堂 柳世哲)공이 1662년
(현종 3년)경에 이룩한 정자이다.
이곳은 원래 서애(西厓)라는 이름이었는데 공의 종증조부이신 서애선생이
이곳에 정자를 마련코자 했으나 재력이 미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지명(地名)인 서애를 당신의 호(號)로 정하였고, 1600년 겸암선생이 그곳의
지명을 흡사 봉(鳳)이 하늘을 날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상봉대라 이름 지었다.
회당공은 그런 유서가 깃든 자리에 정자를 마련하여 후진 교화(敎化)에 심혈을
기울였던 정자이다.
◎悔堂公 柳世哲 : 자(字)는 자우(子遇), 1627년(인조 5년)生. 1681년(숙종 7년)
卒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연산현감(連山縣監) 류원리(柳元履)의 자(子)로 원직
(元直)에게 출계(出系). 재종숙 拙齋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54년(효종 5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했다.
1666년 효종이 죽은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에 대하여 영남유생을
대표하여<상복고증(喪服考證) 29조>를 지어 서인(西人)측의 기년설(朞年說)을
반박하는 <의례소(議禮疎)>를 올렸다.
1675년(숙종 1년)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시작하여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공조좌랑(工曹佐郞) 등을 역임했다.
군위현감(軍威縣監)으로 있을 때는 고을의 서생(書生)들에게 학문을 강의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시문(詩文)에도 능했으며, 저서로는
『 회당문집(悔堂文集)』4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