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
대한민국 중요민속자료 88호. 국보 132호 징비록의 산실
玉淵精舍(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손수 짓고 거처하던 가옥이다.
玉淵精舍(옥연정사)는 옛 집이긴 하지만 엄격한 격식의 사당이 있는 종택(宗宅)과는 다른 서애 선생만의 자유로운 독립 공간이라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스스로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곳이랄까?
배를 타고 오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절벽 끝에 집을 지었다.
玉淵精舍(옥연정사)는 임진왜란을 어렵게 치룬 그의 삶과 모습, 생각과 인생, 분위기가 배어 있는 곳이다. 류성룡 선생은 탄홍스님의 도움을 받아 옥연정사를 마련한 다음 이 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옥연서당기」로 남겼다.

그는 「옥연서당기」에 “중년에 망령되게도 벼슬길에 나아가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년이 되었다. 발을 들고 손을 놀릴 때마다 부딧칠 뿐이었으니, 당시에 크게 답답하고 슬퍼하면서 이곳의 무성한 숲, 우거진 덤불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라고 적고 있다.

또 스스로를 “고라니의 성품은 산야에 알맞지 성시(城市)에 맞는 동물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과, 권위적인 왕조, 권력싸움에서 심한 시달림을 격은 한 학자의 모습이 진하게 느껴진다.
서쪽 절벽에서 찍은 사진, 오음 쪽 문으로 나가 절벽의 좁은 길을 따라가면 겸암정사에 도달할 수 있는 토끼길이 있는데 지금은 일반인들이 다니기에 위험하여 폐쇄됨.
玉淵精舍(옥연정사)를 방문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회마을에서는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마을 보존회에서 나룻배를 운영하고 있다. 다른 한 방법은 하회마을로 들어오지 말고 풍천면 사무소 맞은편으로 난 도로를 이용하여 들어갈 수 있다.
광덕교를 지나 좌회전하여 약500m 정도 가면 화천서원과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약100m를 걸어서 들어간다.

玉淵精舍(옥연정사)는 1576(선조9년) 집 짓기를 시작한지 10년만인 1586년 완공된다. 서애선생의 나이 45세 때이다. 집을 완공한 4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가난하여 집 지을 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홍(誕弘)이란 스님이 그 뜻을 알고 건축을 맡고 재력을 부담하겠다고 자원하여 완공되었다. 1605년(선조38년) 낙동강 대홍수로 하회의 살림집 삼칸초옥을 잃고 이곳에 은거하며 임진난을 회고하여 징비록(국보 132호)을 저술하였다.
하회에서 바라본 옥연정사 하회에서 옥연정사로 가려면 나룻배를 타야한다.
서애 선생은 호를 서애(西厓:서쪽 벼랑)로 짓고 마을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스스로 외로운 ‘고라니의 삶’을 살아가길 원했다.
세심재(洗心齋)
원락재-친구가 먼 곳으로부터 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서당채의 이름이 세심재(洗心齋)이다.
주역계사편 중 의혹종사어사 이서기만일이(意或從事於斯 以庶幾萬一爾) ;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루 감록헌은 왕희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물 구비 바라보네'라는 시어에서 따온 것이다. 감록헌 마루를 가운데로 두고 좌우 방 1칸이 있으며 서애선생께서 서당으로 쓰신 곳이다.

서당채의 이름이 세심재(洗心齋)이다.
주역계사편 중 의혹종사어사 이서기만일이(意或從事於斯 以庶幾萬一爾) ;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루 감록헌은 왕희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물 구비 바라보네'라는 시어에서 따온 것이다. 감록헌 마루를 가운데로 두고 좌우 방 1칸이 있으며 서애선생께서 서당으로 쓰신 곳이다.

(국보 132호)을 저술하였다.
山中無事與兒輩拾橡遇吟爲戱(산중무사여아배습상우음위희)
朝出拾橡東山전 暮出拾橡東山足 조출습상동산전 모출습상동산족
朝朝暮暮拾橡去 衣裳穿結脚不襪 조조모모습상거 의상천결각불말
今年橡林多結子 風飄滿地金丸落 금년상림다결자 풍표만지 금환락
老夫衰病不出門 尙爲資生謀口業 노부쇠병불출문 상위자생 모구업
辛勤日日不知疲 坐對筠籠時一갹 신근일일 부지피 좌대균농시일각
食飽負手下庭行 自笑前時五鼎食 식포부수하정행 자소전시 오정식
옥연정사에서 서쪽 절벽 중간에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이 나 있다. 옥연정사에서 겸암정사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아침엔 동산 마루턱에서 상수리 줍고
저녁옌 동산 기슭에서 상수리 줍네..
아침 저녁으로 상수리 주으러 가니
옷 다 헤어지고 다리는 맨발이네..
올해는 상수리 열매 많게도 열어..
바람 불면 땅 가득 금알이 떨어지네..
늙은몸 쇠약하여 문밖에 나가지 않다가
그래도 살려고 먹을 것을 도모하네..
날마다 부지런히 피로도 모르고
대바구니 마주대고 앉아 때로는 껄껄걸
아이 불러 시냇가에 나무 주워다가
돌솥에 구우니 그 맛이 꿀과 같네..
배부르면 뒷짐지고 뜰로 내려 가니
지난 정승 시절 오정식이 절로 우습네.....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광덕솔밭길 72(광덕리)
화천서원은 조선중기 퇴계학문(退溪學門)에서 수학한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선생의 학덕(學德)을 기리고자 유림(儒林)이 뜻을 모아 서원을 건립하여 묘우(廟宇=祠堂)를 짖고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자인 東離 金允安(본관 : 順天, 1560-1620)공과 종손자인 拙齋 柳元之(1598-1674)공을 배향하였으며 선생의 학덕을 이어받고 추모하기위한 제향(祭享)의 기능을 갖춘 곳이다.

경내에는 由道門, 池山樓, 東/西齋, 崇敎堂, 典祀廳, 景德祠 등의 건물이 있 으며, 향사는 연 1회 음력 3월 15일에 正日로 지내고 있다
화천서원 의 위치
행정구역으로는 안동시 풍천면 광덕솔밭길 72에 자리하고 있으며, 하회마을 북안(北岸)인 부용대를 어깨하고 있으며 서원에서 앞을 바라보면 강변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낙동강물 또한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에는 하회마을과 아름답고 섬세한 자태의 곡선을 가진 화산(花山)이 선생의 묘소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왼편의 산은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하고 오른편으로는 만송정 노송들이 꿈틀 거리며 서 있고 수정처럼 맑은 강물 속에는 부용대가 깊게 그림자를 띄우고 있다.
이렇듯 자연 경관이 조화롭고, 주거 공간인 마을과는 떨어져 한적한 곳이라 사람의 내왕이 번잡하지 않아 서원으로서는 이상적인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다.
종 목 : 중요민속자료 89호
시 대 : 조선 명종
소재지 : 경북 안동시 풍천면 풍일로 181
豊山 柳氏 謙菴 柳雲龍(풍산 류씨 겸암 류운룡)
풍천면 광덕리 저우리의 숨겨진 정자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의 동족마을로 빼어난 자연경관과 민속·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촌이다.
이 집은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맏형인 겸암 유운룡(1539∼1601) 선생이 학문 연구와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선 명종 22년(1567)에 지었다고 하며 부용대 서쪽 높은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정사( 사랑채 )는 하회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남쪽 절벽 위편에 안채는 정사 뒤쪽에 배치하였다. 정사는 2층 누각 형식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이다. 가운데에 대청 4칸을 두고 좌우로는 방을 두었다. 방 앞쪽으로 좁은 퇴를 마련하였으며 ‘겸암정’이라고 쓴 현판 은 스승인 이황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 2칸과 안방 2칸, 오른쪽에 건넌방 2칸을 두었다. 안방과 건넌방 앞쪽으로는 툇마루 를 마련해 놓았다. 짚을 이어 올린 헛간채는 안채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높은 절벽 아래 굽이도는 강줄기, 자연이 어울린 진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정사(精舍)다운 지형 요건과 전통이 배어 있어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겸암 류운룡 선생은 관찰사를 지낸 후 영의정에 추증된 풍산부원군 류중영의 맏아들로 안동 하회마을에서 태어났다.
총명함과 우애 그리고 효성을 타고난 그는 16세 때(1554년) 퇴계 선생의 문하에 나아갔다.

이때의 문자가 '수선부급(首先負?) 등문청업(登門請業)'이다. '가장 먼저 책을 짊어지고 문하로 나아가 학문을 청했다'는 의미다. 이는 겸암집 연보에 나오는 글로, 당시에 폭넓게 인정된 내용이다.

문중에서는 '수선(首先)'이라는 문자에 자긍이 있다. '아직 아무도 문하에 나가지 않았을 때 우리 겸암 선조께서 처음으로 나아가시자 비로소 다른 제자들이 수업을 하러 모여들었다'고까지 해석하기도 한다.
여하간 겸암은 퇴계 문도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급문(及門)해 아주 오랜 기간 선생으로부터 깊이 있는 학문을 전수한 대표적 제자임에는 틀림없다.

퇴계 선생은 1567년(명종22) 봄에 겸암이 정자를 지었다는 소식을 듣자 "군이 새 정자를 지었다는데 내가 가서 함께 공부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네"라는 시와 함께 주역의 겸괘(謙卦)에서 딴 겸암정(謙菴亭)이라는 현판을 손수 써서 내렸고 이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퇴계는 "뜻이 비범하고 향학심이 대단해 참으로 얻기 어려운 사람이다"라고 칭찬했고,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류운룡이 병이 들었다니 걱정이다(柳雲龍病 可慮)'라고 적었다.

사제 간에 신기상통(神氣相通)한 모습이다. 이때 작성되었을 '강의 노트'가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겸암은 성품이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며, 좋고 싫음의 구분이 너무 분명했다. 감정을 드러냄에도 항상 솔직하여 동지 간들이 공경하면서도 멀리할 만큼 모난 데가 있었다.

그러나 겸암은 퇴계선생에게 겸암이란 이름을 받고 이 정자에서 5년여 각고의 수행 끝에 모나고 별난 성품을 다스려 너그럽고 원만한 덕성을 길러, 도량이 너그럽고 혼후(渾厚)한 인품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인품은 훗날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모두에게 존중받았다. 택당(澤堂) 이식이 지은 겸암묘갈명에는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여(謙謙君子), 내면의 본체는 굳세고 외면의 마음 씀은 온유하셨도다(體剛用柔)'라고 적고 있다.
소재지 : 안동시 풍천면 풍일로 36-37
안동시 지정문화재
파산정은 안동시 풍천면의 낙동강 기슭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파산 유중엄의 정자이다.

유중엄은 1564년(명종 19) 낙동강 언덕에 정자를 지어 학생을 가르치는 장소로 삼고자 스승인 퇴계 이황에게 물었는데 “형편에 맞게 차차 이룩하라.”는 답장을 받았다.

그러나 미처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34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길을 가는 사람마다 그곳을 가리키며 애석해 하던 것을 1935년 사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드디어 정자를 짓고 파산정이라 현판을 걸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아주 단출하다. 하회마을을 감아 도는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는 벼랑 위에 건립되어 주위 경관이 아주 빼어나다.
이 건물은 파산 류중엄(柳仲淹)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이다.
풍천면 소재지에서 광덕으로 가다가 낙동강과 마주치는 곳에서 좌회전하면 파산정이 낙동강을 바라보며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중앙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 전형적인 정자건물이다.
류중엄(1538∼1571)의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자는 경문(景文), 희범(希范)이며 호는 파산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동문수학한 남치리와 함께 공자(孔子)
신나고 시원스럽게 일필휘지로 마무리한 행서이다. 정자 앞을 흐르는 강물의 흐름이 마치 파(巴)자를 닮았다고 하여 당호로 삼았다.
문하의 안자(顔子)에 견주어 계문(溪門)의 안자(顔子)라 불렸으며, 타양서원(?陽書院),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유고 몇 편이 『파산일고(巴山逸稿)』에 전한다.
성명 : 유중엄(柳仲淹) , 1538년 1571년
본관 : 풍산(豊山)
자 : 경문(景文) 희범
호 : 파산(巴山)
출신지 : 안동(安東)
분묘지 : 안동(安東) 서후면 금계리 (능골) 천등산(天燈山)
과거를 사양하다.
많은 선비들과 과거장에 임하였을 때 모두들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오늘의 장원은 이 사람(유중엄)일 것이다.” 하므로 이를 듣고 드디어 글 지은 것을 제출하지 않고 과장에서 나왔다.

퇴계의 편지 유희범에게 답함
오랫동안 소식이 막혔더니 홀연히 장서를 받아 말씀한 뜻을 잘 알았으며, 귀를 열어 주심이 많으니 매우 고맙고 또 다행한 일입니다. 나는 계상(溪上)에 우거(寓居)하며 큰 병은 없으나 다만 늘그막에 곁에서 보인(輔仁)할 친구조차 없으니 보내 온 말씀보다 더 쓸쓸하여 걱정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늘 생각에 그대 같은 벗이 있는데 각자가 사고로 인해 항상 같이 학문을 닦는 힘을 얻지 못하게 됨이 한스럽습니다. 또 그대의 소처(所處)를 상상하면 본 의사를 깨뜨린 일이 없지 않을 것인데 어찌 배겨나는지. 이것은 마땅히 형편에 따라 선처하여, 덕을 스스로 잃지 말고 또 남에게 원성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덕을 기르고 학문에 진취하는 한갓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전에 말씀한 강상(江上)에 지으려던 정사(精舍)는 아직 이룩하지 못한 것은 고상한 회포에 상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급속히 서두르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니 마땅히 형편에 따라 종용히 이룩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서울에 가는 것은 시속(時俗)에 흔들린 것 같긴 하나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본시 하는 수없이 진력할 것이나 과거(科擧)를 하고 못함은 하늘에 맡길 일이니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책문(策文)3)의 글제는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라 이곳 여러 사람들도 알려고 하는 이가 간혹 있으나 모두 응답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스럽습니다.

종씨(從氏)의 감사(監司) 임명도 가히 축하할 일인데, 이현(而見:서애西厓)이 또 뛰어난 재주로 앞길을 열게 되었으며 그 사람들 형제의 취지(趣旨)가 매우 고상하니 가상한 일입니다. 친구 간에도 서로 경사로 여기거늘 하물며 그대는 어떻겠습니까! 다만 이현의 장인(丈人:현감 이경李坰)이 불의에 세상을 떠났으니 놀랍고 통곡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