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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백두를 가다] ⑮류성룡 자취 생생한 하회마을

옥연정사 1 3,719 2009.04.15 09:27
 대구 매일 신문 4/10자 기사입니다.

<우연찮게 우리아이들과 제가 사진의 모델이 된 기사입니다.첫번째 사진 속 층길을 걸어오는 장면>

지난 2007년 11월, 안동 풍산읍 수동리 마을 뒷산에 모셔진 서애 류성룡 선생의 묘소에는 전국에서 수백명의 유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묘제를 올렸다. 서애 선생 서세 400주년을 맞은 날이었다. 400년, 이제 잊힐 만큼 세월이 흘렀건만 그의 마음과 혼이 살아있는 듯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쓴 유림들의 제 올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못해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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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애 류성룡은 겸암정사에 있는 형을 만나기 위해 옥연정사와 겸암정사 사이에 있는 부용대 층길을 아침저녁마다 걸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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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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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연정사

묘소에는 그 흔한 신도비 하나 없다. 6대 후손 운(澐)이 지은 간단한 묘비만 서 있다. 제각 하나 없는 초라한 묘소에서 일생을 청빈하게 살아온 서애의 뜻이 고스란히 살아 전한다. 서애의 서세 400주년 기념행사가 전국 각지에서 열렸던 것도 청빈과 검소한 삶을 보였던 유덕에 감동한 후인들의 자연스러운 흠모일 것이다.

일행은 서애의 일상을 더듬기 위해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를 찾았다. 정사 마당에는 수백년 된 노송이 버티고 섰다. 서애가 제자들과 함께 심었다고 전한다. 서애 소나무는 옥연정사와 부용대 절벽 곳곳에서 울울창창 솔숲을 만들어 놓고 있다.

서애의 손자 졸재 류원지는 자신의 문집에서 하회마을 16비경을 기록하면서 입암청창(立巖晴漲)과 마암노도(馬巖怒濤)를 1, 2경으로 쳤다. 겸암정사 앞 입암바위는 서애와 겸암 형제간의 우애 깊은 정을 말한다. 부용대 앞에 선 마암의 당당함이 선비의 기개를 말해주고 잔잔한 겨울의 말바위가 세상을 향해 부지런히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할아버지 형제의 모습에 감동한 발로다.

형제의 우애는 부용대 절벽에 좁다랗게 난 층길(친길)에서 고스란히 전해온다. 서애가 1586년 옥연정사를 지어 부용대 절벽 반대편 입암 위에다 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에서 후학들과 연구하던 형을 만나러 갔던 길이다. 이 층길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80년 전 하회마을(1828년 하회마을) 그림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이 알려지면서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발을 내디딜 정도로 좁다란 500여m의 절벽길은 서애가 아침저녁으로 형 겸암을 찾아 다녔던 발자국의 여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발 아래로는 깎아지른 절벽과 바위, 낙동강 물결이 정신을 아찔하게 한다. 머리 위로는 까마득한 층층바위가 덮치듯 내려다본다. 이 길을 걸으면서 서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낯선 새들의 조잘거림이 정겹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다람쥐가 인기척에 놀라 재빨리 몸을 숨긴다. 강에서 불어온 바람은 부용대 절벽에 부딪혀 한바탕 소용돌이를 친다.

옥연정사에서 고택체험을 운영하는 김정희(43)씨는 "예전에는 층길이 3곳이었다고 전해 온다. 지금의 층길 아래와 위쪽으로 더 있었다고 한다. 서애는 형님에게 무언가를 전해줄 때는 손수 지게를 지고 지금의 층길을 걸었다"며 "지금은 세월의 풍파에 깎여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층길에서 400년을 거슬러 형제간 우애를 배운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고 한다.

층길이 끝날 즈음 눈앞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가로막는다. 이 나무들도 서애가 먼저 세상을 떠난 형님을 그리워하며 제자들과 함께 심었다고 전한다. 향나무와 상수리나무로 둘러싸인 겸암정사는 입암 절벽 위에 버티고서 하회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겸암정사 입구에는 '겸암사'라는 시 한편이 새겨져 있어 형에 대한 서애의 애틋함이 묻어난다.

'내 형님 정자지어 겸암이라 이름지었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내리고 매화는 뜰가득 피어있구나, 발끝엔 향그런 풀냄새 모이고 호젓한 길에는 흰안개 피어나네, 그리움 눈물되어 소리없이 내리고 강물도 소리내며 밤새 흐르네.'

하회마을은 산과 강이 'S'자 모양으로 어우러져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이라 한다.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모습을 띠고 있다. 또 행주형(行舟形)이라 해 마을에 우물을 파지 않는다. 이 마을에는 충효당과 양진당이 대표적 종가로 두 기둥을 이루고 있다. 또 이 마을에는 남촌댁과 북촌댁이 반가의 두 기둥으로 버티고 서 상하를 어우러지게 한다. 그뿐이랴, 화천서원과 병산서원이 또한 두 서원으로 학문적 기둥을 이루고 있다. 옥연정사와 겸암정사가 서로 교류하며 마을의 기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병산서원은 서애가 후학을 길러내는 도량으로 삼았다. 차경(借景)! 경치를 빌려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살았던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말이다. 병산서원의 만대루에서 바라본 병풍절벽과 낙동강은 한 폭의 그림이다. 이곳은 지금에 와서도 한번쯤 다녀가지 않으면 건축학도라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지금도 병산서원에서는 수시로 학회가 열리고 학술토론이 벌어지는 경학장이 된다. 서애의 학문과 사상, 우국충정의 뜨거운 혼이 식지 않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학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임진왜란을 치른 탁월한 공신 서애가 받은 서훈은 거창하다. 조선국(朝鮮國)을 시작해 수충(輸忠) 익모(翼謀) 광국(光國) 충근(忠勤) 효절(效節) 호성공신(扈聖功臣) 등의 칭호에 풍원부원군의 봉호를 받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글자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그의 충과 효가 담겨있다.

서애는 임진왜란 1년을 앞둔 시점에서 혁신적 인사를 천거했다.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도수사로 삼았다고 서애연보에 나타난다. 현감을 수사에 오르게 한 것은 지금의 6급을 3급에 발탁한 것이나 다름없다. 서애의 탁월한 안목이 나라를 구한 결과가 됐다.

하지만 서애는 큰 공훈에도 불구하고 당파싸움에 밀려 노년기를 불우하게 은거했다. 그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언덕을 오르지 않으면 올 수 없는 옥연정사에 은거하며 징비록을 썼다. 혹독한 전쟁과, 이후 가난과 병마로 비참했던 서민들의 살림살이, 그 대책과 비방을 조목조목 적어 후세에 경계토록 했다.

서애가 "이제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로만 다만 뒷날에 경계로 삼아야 하겠기에 자세하게 적어둔다"고 한 징비록 저작 목적이 새롭게 와 닿는다. 나라가 어려우면 생각나는 재상 서애, 형제와 우애있게 지내고 홀로 되신 어머니를 걱정해 안동 인근 벼슬길을 자처했던 류성룡, 하회마을 곳곳에서 그의 뜻이 오롯이 전해지고 있다.

400년 전 서애의 나라사랑과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깎아지른 듯 버티고 선 부용대를 넘어 수천년 세월을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을 건너 문학산 아래로 넓게 형성될 천년 명품도시 신경북도청의 앞날에도 그대로 전해질 것이란 믿음이 안동 사람들 마음일 것이다.

이종규기자 안동·엄재진기자

자문단 : 김휘동 안동시장 / 권두현 안동축제관광조직위 사무처장 / 안동시청 이상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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